이라크 평화재건군인가? 쿠르드족 독립지원군인가?
이라크 평화재건군인가? 쿠르드족 독립지원군인가?
  • 정욱식대표
  • 승인 2004.05.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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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평화재건군인가? 쿠르드족 독립지원군인가


이라크 유혈사태의 악화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파문으로 한국의 추가파병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지로 검토되고 있는 쿠르드족 자치정부측이 10일 한국군의 파병을 환영한다는 공식입장을 외교 경로를 통해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추가파병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연합뉴스가 11일 보도한 것에 따르면, 쿠르드 자치정부측이 한국에 보낸 서한 내용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한국군 파병과 관련해 의례적인 수준 이상의 적극적인 파병환영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정부는 이미 파병지역을 아르빌로 잠정 결정하고 쿠르드 자치정부측의 공식 파병 요청을 기다려왔었다. 그러나 '외국군'의 주둔이 독자적인 주권 확보와 치안안정을 자랑해온 쿠르드 지역의 대외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와 공항 사용권을 한국군에게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 등을 놓고 쿠르드 자치정부측은 한국군의 파병 요청을 늦춰왔었다.


왜 쿠르드 자치지역인가?

그러나 정부가 파병 지역으로 쿠르드 자치지역을 내정한 지 한달 여만에 쿠르드 자치정부가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해옴으로써, 파병 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기존의 파병국의 잇따른 철군 방침 천명과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파병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조속한 파병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추악한 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져 파병 명분을 찾기 쉽지 않고, 4.15 총선이후 새롭게 형성된 국회에서도 파병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정부의 '파병 딜레마'는 더욱 커져갈 것으로 보인다. 탄핵으로 인해 두달만에 복귀할 것이 확실해지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결단을 내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파병 논란과 관련해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왜 쿠르드 자치지역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아르빌 등 쿠르드 자치지역이 이라크에서 가장 안정화된 지역이기 때문에 평화재건 임무에 적합한 지역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는 한마디로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쿠르드 자치지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미영연합군이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으로 지정해 후세인 세력의 유입을 차단한 사실상의 독립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쿠르드 자치지역은 이번 전쟁의 화마(火魔)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역에 '전후복구와 평화재건'을 위해 간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군의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의 파병은 두 가지 차원에서 그 배경을 추적할 수 있다. 하나는 '부시 체면 살려주기'라는 정치적 요식 행위로서의 의미이다. 추악하고 더러운 전쟁으로 전락하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잇따른 파병국들의 철군 선언 속에서 한국의 파병은 이라크 안정화의 실질적인 효과와 관계없이 부시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한국의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의 파병은 미국의 대중동 정책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한국에 요청해온 파병 지역을 검토해보면 이와 같은 추론이 결코 지나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라크 원유의 최대 매장지이자 쿠르드족 자치 및 향후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인 키르쿠크에 한미연합군의 공동 주둔 및 작전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아르빌과 술라이마이아 가운데 한군데에 주둔을 요청했고, 이를 사실상 관철시켰다.

이를 종합해보면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군의 쿠르드 자치지역의 주둔은 이라크 안정화 효과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의도에 대한 세밀한 검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 저항세력의 총반격과 재건사업의 총체적인 차질로 이라크 정책의 실패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왜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고 아랍세계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쿠르드 자치지역에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는가'라는 의문이 쉽게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미국이 친미 성향의 쿠르드 자치지역이나 독립국가의 건설을 지원해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전략에 한국을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한다. 미국이 쿠르드 자치지역에 미군을 주둔시킬 여력이 없고 다른 아랍국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동맹국인 한국군의 '대리 주둔'을 통해 대중동 정책의 교두보 마련을 꿈꾸고 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의 배경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되어왔지만, 가장 큰 전략적인 목적은 중동 질서를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않는 친미 지형으로 바꾸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중동의 지리적 요충지이자 반(反) 아랍 친미 정서를 갖고 있는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독립국가나 독립국가에 준하는 자치지역을 건설할 경우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라크 점령이 뜻대로 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이라크에서 반미성향의 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시 행정부에게 쿠르드 자치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부시 행정부가 임시헌법에 쿠르드족의 거부권 행사를 명시하고 이라크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지역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 키르쿠크를 쿠르드족에게 반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파병 강행시 아랍-쿠르드 분쟁에 휘말릴 수도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의 파병 강행시, 최악의, 그러나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는 한국이 아랍-쿠르드 사이의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라크 북부 지역은 독립국가 건설을 원하는 쿠르드족과 분리 독립을 저지하려는 아랍계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벌써부터 쿠르드족과 수니-시아파 사이의 충돌과 반목이 발생하고 있고, 6월 30일로 예정된 정권이양 이후에는 더욱 첨예한 종족 갈등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도 잇따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쿠르드족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쿠드르족은 터키에 1천3백만명을 비롯해 이란에 5백만명, 시리아에 2백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은 대(大) 쿠르디스탄 건설을 원하고 있는 반면에, 터키, 이란, 시리아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전쟁도 치르지 않은 지역인 쿠르드 자치지역에 발을 들여놓을 경우, 아랍세계의 반한감정을 고조시키고 분쟁에 휘말릴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쿠르드 자치정부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았다고 해서 파병 근거를 확보했다고 판단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미국이 왜 한국에게 이 지역의 주둔을 요청했는지 그 의도를 충분히 분석·검증하고, 한국군의 쿠르드 자치지역 주둔에 대한 아랍인들의 입장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아랍세계와 쿠르드족 사이의 분쟁 가능성은 어떠한지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욱식/200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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