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작고 소박한 그릇에 채우는 행복
49호) 작고 소박한 그릇에 채우는 행복
  • 장갑수
  • 승인 2004.04.0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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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소박한 그릇에 채우는 행복


“금낭화 참 예쁘다.”
“아빠, 이 꽃 이름은 뭐야?”
“초롱꽃이야.”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꽃이 만발해 있다. 2월부터 피기 시작한 꽃이 5월이 된 지금까지도 피고지기를 반복한다. 올 봄 우리 집에는 매화, 철쭉, 명자나무를 비롯하여 초롱꽃, 금낭화 같은 야생화까지 꽃을 피워 집안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어놓았다.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한다.
“여보, 저 소사나무 연잎 좀 봐. 예쁘지요?”
사실 신록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겨우내 잔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던 소사나무에 새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날마다 색상이 달라지는 연잎을 보고 있노라면 아름다움을 넘어 생명의 신비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벤자민이나 관음죽, 스파트, 양란 같은 관엽식물들은 일년 내내 변함없는 모습으로 집안에 푸름을 유지시켜준다. 직장에서 근무하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면, 화분의 녹색 잎들이 안마하듯이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나와 아내가 화원에서 하나 둘 사다 모은 화분은 이제 우리 집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은 우리 식구에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아름다운 마음을 키워준다. 몇 평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이지만 여기에 놓여진 화분은 사시사철 우리 식구의 마음을 살찌우는 귀중한 생명체들이다.
화분에 심어진 화초나 나무를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 물을 주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어쩌다 깜박 잊고 물주는 시기를 지나치기라도 하면 나무란 놈은 활력을 잃은 모습으로 즉각 신호를 보낸다. 그럴 때면 나무에게 미안하고, 그 모습이 안쓰러워 얼른 물을 준다. 물을 주고 나면 나무는 싱싱함을 회복하여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렇듯 베란다의 화분들이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꾸고 기르는 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제때에 물을 주어야 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름도 해주어야 한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주어 바람을 쏘여주기도 해야 한다. 햇볕과 양분, 물, 공기가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나무도 잘 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에 대한 사랑이다. 나무도 사람의 사랑을 받은 나무가 훨씬 잘 자라고, 더 아름다운 꽃도 피운다. 인간이 나무에게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은 나무는 아름답게 자라 인간으로 하여금 안정된 정서를 갖도록 해준다. 화초를 가꾸면서 얻어지는 뿌듯한 마음과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마음에 여유를 주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창조한다.

나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은은한 녹차 향을 좋아하고, 그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조용한 산사나 경관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마시는 녹차 한 잔을 가장 좋아하지만 일상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그런 시간을 자주 갖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조용히 녹차 마시기를 즐긴다.
집에서 녹차 마시는 시간 중에서도 토요일 오전, 고요함이 흐르는 거실에서 녹차를 마시는 시간이 제일 기다려진다. 주5일 근무를 하는 덕분에 나는 토요일을 쉬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도 직장에 나간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가고 나면 오전시간은 혼자 집에 남게 된다. 아침식사 후 화분에 물을 주거나 신문을 보고 나면 나 홀로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고요한 시간이 된다.
이럴 때 나는 녹차를 마신다. 녹차는 역시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실 때 제 맛이다. 물을 끊이고, 다기와 녹차를 준비해 놓고는 음악을 튼다. 조용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클래식이나 국악을 들으며 천천히 녹차를 마신다. 물이 너무 뜨거워도 안되고, 너무 식어버리면 녹차가 우러나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70~80℃ 정도 될 때, 녹차가 담긴 용기에 물을 부어 1~2분 우려낸 후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른다.
귀로는 음악소리를 듣고 혀로는 맛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마시는 녹차는 나의 마음까지도 고요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것도 겨울 나절,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통하여 파고드는 햇살과 함께 하는 날이면 더욱 좋다. 겨울 햇살은 은은한 녹차 향기에 포근하고 아득한 정서를 가미해준다.
비가 오는 날, 음악 대신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녹차도 운치가 있다. 창문 너머로 산이나 들판 같은 자연경관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을 가져보지만 현재의 조건으로도 좋다. 눈 오는 날,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녹차는 그윽하다. 그것도 흩날리지 않고 조용하게 내리는 눈이면 금상첨화다.
가끔 아내와 함께 마시는 녹차는 부부간의 정을 깊게 해준다. 아내와 나는 우러난 녹차를 찻잔에 차례로 따라 천천히 마시면서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다. 이 때는 특별한 말이 필요 없다. 차를 마시면서 녹차 향기에 아내만 대입시키면 된다. 아내와 차를 마실 때도 차를 준비하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녹차를 준비하는 일 자체도 즐겁고, 마시는 일은 더욱 즐겁다. 어떻든 녹차를 마시는 시간은 일상에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다.
녹차를 마시고 나면 그 잎을 화분에 뿌려준다. 이로써 녹차 잎은 화분의 거름이 된다. 이처럼 녹차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녹차 잎은 썩어 화분의 식물이 튼튼하게 자랄 수 있게 해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생활은 평일에는 직장일로 바쁘고, 주말 휴일 이틀 중 하루는 산에 가고, 주중 퇴근 후에는 산행기로 쓰는 일로 바쁘다. 그리고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저녁 약속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의 생활이 정신없이 바쁘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가끔 몸이 피곤하거나 하면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이런 생활을 즐기는 편이다.
생활이 바쁘다보니 독서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가꾸기 위해서는 항상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바쁘게 살다보니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따름이다. 비록 바쁜 시간이지만 어떻게 잘 쪼개어 쓰느냐에 따라서 시간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특별히 하는 일없이 잠자리에 누워서 빈둥거리는 시간이 의외로 많다. 나는 이런 시간을 아껴서 짧은 시간이나마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산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 해당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자연에 대한 공부를 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살찌우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책을 틈틈이 읽는다.
아침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 몇 분이라도 책을 읽고 나서 활동을 시작한다. 잠자기 전에도 잠깐 독서를 한다. 여행을 하거나 할 때,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깜짝 독서를 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자투리 시간이 있다. 그 자투리 시간을 모으면 엄청난 시간인데, 그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언제부턴가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다. 그래서 나는 항시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닌다. 시간 여유가 생길 때 즉시 꺼내서 읽기 위해서다. 책 읽는 동안은 항상 가슴 뿌듯하고 즐거움을 주는 시간이다.
나나 아내가 평소에 책을 가까이 하다보니 아이들도 책을 가까이한다. 두 아들 다 학교공부를 특별히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어떨 때는 우리 집 네 식구가 각자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경우가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책 읽는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가정의 평화로움이 동시에 얻어진 느낌이다.

사실 집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 즐기는 작은 여유에서 행복은 온다. 화분을 가꾸고 화분에 핀 꽃을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여유에서 오는 행복이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영혼을 맑게 하는 여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이다.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를 갖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우리의 행복을 창조한다.
누가 보면 하찮은 것이지만 작은 것에 만족하며 여유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지름길이 아닐까? 크고 거창한 그릇에다가 행복을 채우려면 그 만큼 어렵고 힘이 들겠지만, 작고 소박한 그릇에 채우기는 쉽고도 간편하다. 그래서 나는 쉬운 방법으로 행복을 채우기로 했다. (장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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