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책 산책(散策)]용서에 대하여
49호)[책 산책(散策)]용서에 대하여
  • 유영희
  • 승인 2004.04.06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산책(散策)]

용서에 대하여


[눈물이 나도록 용서하라], 제럴드 잼폴스키 / 공경희 옮김, 한경BP, 2000.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빗 씨맨즈 / 송헌복 옮김, 두란노, 1986.


목사님께
며칠 전 한살림 일로 장충동 성 베네딕또 피정의 집에 갔다가 분도출판사가 앞에 있길래 들렀댔습니다. 예전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어린이 책이 정말 좋아서, 또 좋은 시청각물도 내는 곳이기도 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는데, 그 동안 못 가다가 이렇게 사무적인 일이 있고서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책 저 책 구경하다가 [동글이의 선물]이라는 책을 작은 아이를 위해서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속표지를 보니 감리교 목사가 쓴 책이어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용기를 내서 샀습니다.
아이는 그 책을 정말 좋아했고 잘 읽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더군요. 내심 이 책을 잘 이해할까 걱정했는데 신통하게도 그 책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소통의 의미와 중요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조금씩 읽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머리로만 이해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것은 주로 자기의 생각을 밑받침하는 논거로 매번 성경을 들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하나님으로 결론나는 모양새가 상투적으로 느껴져서, 어쩌다 내가 이런 책까지 읽게 되었나 싶어 마음 한편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3-4일을 보내면서 갑자기 지난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요 몇 주 동안 성당에 나가고 있는데, 처음 성당에 다니고 싶었던 이유가 생각났던 겁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갑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는 왜 교회 안 다니냐는 큰 아이의 성화도 있었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당시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위기의식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의식의 원인 역시 표면적인 것과 심층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표면적이라는 것은 남들한테 말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고, 심층적이라는 것은 누구한테도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천주교에 무슨 인연이 있거나 평소 생각해왔던 곳은 아니었는데, 하필 성당으로 가게 된 것은 종교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제 원칙이 걸어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더 가까운 곳에 교회는 많습니다만, 이상하게 개신교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코드가 안 맞았고(목사들 특유의 말투가 아주 싫습니다), 좀더 감정적으로 친숙한 곳은 절이지만 가까이 갈만한 절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걸어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제 원칙이 생긴 것은, 첫째 움직일 때 에너지소모가 가장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수시로 원할 때 쉽게 가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원칙이 생긴 것은, 종교생활이라면 모름지기 기본적으로 친환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차 타고 교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물론 어쩌다 가는 성지 순례야 어쩔 수 없는 거기는 하겠지만요. 당시 제가 환경의식이 엄청 높았을 때라 그 원칙은 상당히 중요했거든요. 좀 우습죠?
처음 사람들이 제가 성당에 다니자 모두 놀랍니다. 제가 성당에 다닌다니 목사님도 좀 놀라셨죠? 동양철학 공부하는 사람이 기독교를 다 커서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원론적인 놀라움에서부터,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교회로 인도할 걸... 하는 아쉬움에 이르기까지 놀라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말입니다. 아쉬워하는 사람 중에는 ‘기왕이면 교회로 오시지요?’하는 은근한 회유에서부터 ‘성당에서는 구원 못 받아요’하는 협박까지 표현은 다양하더군요. 이래서 제가 교회를 경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걸어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성당을 선택하다 보니,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나 T.V. 화면이 아닌 현실에서 신부를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다니게 된 것은, 인연이 닿느라 그런 건지 그 당시 자주 선곡되던 성가가 죄다 최루탄이었다는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식이다 보니 하느님이니 기도니 하는 형식은 내내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어색했습니다. 세례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세례도 받게 되었는데(한심하죠?), 세례를 받는 날부터 시작된 실망은 끝내 1년도 못되어 막을 내리게 되었고, 마음을 못 붙이고 이른바 냉담 상태로 3년여를 지내게 되니, 그 절실하고도 중요한 이유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어이없고 한심한 일입니다.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 생각이 난 것 같습니다. 머리로 이해했든 가슴으로 이해했든, 내가 이것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절박한 이유가 조금 되살아난 거죠. 그래서 그 책을 읽기 시작한 지 5일만에 일찍 성당에 갔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려구요. 그런데 성사를 한다는 불빛이 보이고, 안에 성사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용기가 안 나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미사 때 잠시 젊은 보좌신부님을 보며 저 사람은 무에 그리 용서받을 일이 많아 사제가 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갑자기 짠해져서 잠시 눈물난 것을 빼놓고는, 다른 때와 같은 최루성 성가도 그 날은 없었고 강론도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여서 조금은 차분하게, 조금은 밋밋하게 미사시간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말씀드린 샘터에 와서 오랜만에 청소를 했습니다. 문고의 서가도 걸레로 닦아가며 꽤 부산스럽게 큰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서가를 닦다보니 ꡔ눈물이 나도록 용서하라ꡕ라는 책이 눈에 띕니다.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인데, 누군가 우리 두레문고에 기증한 책입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기증받고 얼마 안 돼서 조금 읽은 적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책을 보는 순간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청소를 마치고 책을 펴들면서 바라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동시성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바로 이런 책이 눈에 띄는구나 하구요.
그 책의 서두는 이렇습니다. 지금 메모지를 가지고 와서 내가 용서해야할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라. 그 명단에는 부모 형제 배우자 연인과 같은 사람도 있고, 기관도 있고, 단체도 있고, 또 자기 몸이나 자기의 감정상태도 있을 수 있다면서요.
그리고 나서 이 책은 그러면서 사람들이 겪는 불행의 근원과 그 불행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용서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읽을 때는 못 느꼈던 것들이 지금은 왜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지는지, 책을 읽는 내내 정말 나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싶어져서 엉엉 울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책에도 나온 것처럼 ‘너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려면 용서하지 않는 게 최상이야’,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야’, ‘용서하면 신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걸’하는 에고의 소리가 계속 들려오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용서의 가치, 효과, 그리고 용서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평온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단계가 저자의 생생한 체험과 임상사례를 통해 서술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평과 용서하지 못하는 생각에 얽매이는 것은 고통을 받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용서는 행복에 이르는 열쇠라고 믿는다’ 등의 준비단계를 거쳐 ‘용서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 쓰기’, ‘유일한 목표는 타인을 변화시키거나 벌주는 게 아니라 마음의 평온임을 분명히 하기’, ‘타인을 용서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자신을 용서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용서가 주는 행복과 평화를 누리기’ 등의 행동단계에 이르기까지 용서를 위한 지침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용서라는 단어가 조금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서란 모든 이에게서 그의 행동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빛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용서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이루어질 때보다 사실은 나 자신을 향해서 이루어질 때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 같습니다. 즉 용서는 나의 잘못을 덮어주거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빛을 보는 거라는 거죠.
사실 [논어]에서도 충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충(忠)은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는 단순히 죄를 덮어준다 묻어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진정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안의 진실을 보듯이 다른 사람의 진실을 보아야만 가능하겠죠. 그것이 바로 공자가 생각했던 군자의 한결같은 도의 실천이었다고 증자가 이해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아직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용서하는 힘을 어떻게 찾아야 한단 말인가요? 하느님의 빛은커녕 정말 나락에 떨어져서 저 자신을 추스리지도 못할 때, 용서하라는 지시, 교훈만으로 과연 어디에서 용서의 힘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용서한 사람의 놀라운 변화사례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평화롭게 되고 싶다는 부러움과 소망을 갖게 되지만,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이 책은 용서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상과 용서의 가치와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리얼하게 서술하고 있어 통곡을 할 정도였지만, 용서에 이르는 방법은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먼저 읽고, 다시 며칠 전에 산 책 뒷부분을 마저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용서에 이르는 방법이 성경을 토대로 기술되어있었습니다. 일단 처음 들었던 약간의 거부감을 뒤로하고 그대로 따라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목록을 따라 마음속으로 명단을 적었습니다.
가장 상처주기 쉬운 사람들이 부모라고 하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가?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받았다고 느꼈던 설움이 복받쳤습니다. 아버지는 애교 많고 예쁜 동생을 편애했고, 엄마는 제가 잘못하면 꼭 서두를 ‘덩치는 인왕산만 해 가지고는....’이라는 말로 시작했죠. 길거리의 철없는 꼬마들은 외모를 보고 별명 붙이고 놀렸고요. 그 별명은 수치스럽고 화가 나서 지금도 입에 올리지 못하겠어요. 아직도 국민학교 3학년 때 학교 가던 논둑길에서 있었던 그 일을 잊지 못합니다. 나쁜 놈들... 지금이야 감정적으로 흥분하지는 않지만, 정말 한참동안 상처가 된 일이었습니다.
아마 또래 애들 중에서 저보다 큰 애를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컸던 그 애는 말라깽이여서 저와 비교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요.
제가 대학 입학 면접 때 왜 심리학을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저는 그때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을 알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 시절 느꼈던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회의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있었기 때문이죠. 저에 대한 열등감, 자기 연민 역시 바닥을 쳤구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죽겠다고 조퇴한 적도 있었죠.
고등학교 때는 불교학생회에서 만난 어떤 남학생이 제 친구한테 쪽지(연애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저한테 미안하니까 인사치레로 쪽지 줬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 어찌나 기분이 나쁘던지. 그런데 그때 기분 나빴다는 말을 지금 처음 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쓰고 있노라니 웃음이 납니다. 사실 그 얘기는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그 남자애한테 화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 자신에게는 화났죠. 바보같이 그런 심부름 댓가로 주는 쪽지나 받고. 아마 저는 그런 모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겁니다.
사춘기 때 제가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어, 책은 언제나 똑같지만.’ 책에 써있는 글자는 변하는 게 아니니까. 불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죠.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 눈에 책은 영원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기억때문인지 지금도 책을 한참 안 읽으면 금단 현상처럼 불안해지고 긴장이 됩니다. 사람 만나는 것은 아직도 힘들고요. 아무도 안 믿지만...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더 꼬인 것 같아요. 문제가 해소되는 게 아니고 계속 쌓여만 갔으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엄청 급진적인데 현실에서는 깡보수이거나, 소설 속에서는 엄청 이성적이고 고상한데 현실에서는 완전히 형편없는 거죠. 예를 들면 고등학생 시절, 현실에서는 다른 애들이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경멸을 하면서도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보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감동하고, 현실에서는 시험시간만 되면 배가 아파 10분만에 나오는 소심증 환자인 주제에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나 [싯타르타]를 읽으면서 철학적인 사색에 잠기는 그런 식으로 말이죠.
시간이 갈수록 책을 통해 얻는 대리만족은 커져만 갔고 현실에서의 부적응은 깊어만 갔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ꡔ상한 감정의 치유ꡕ의 씨맨즈 목사 말처럼 남들의 인정과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대인관계에서는 아주 긴장을 많이 합니다. 조그만 실수도 화가 나고 창피해서 사람을 멀리해왔어요. 지금도 많이 그런 편이에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런데 그런 낮은 자존감은 어른이 다 되어서도 정리가 안되더군요. 결국 다른 사람의 부당한 요구를 결단력 있게 거절하지 못하고 끝내 엉뚱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나를 용서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내가 상처 준 사람에게 참회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단 몇 분간의 고해성사로 정리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종교는 참 편한 거죠. 죄짓고 와서 고백하면 다 용서되는 거니까.
저는 제가 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너무나 무책임하고 편의적인 것같아서, 마음 한 구석으로는 종교의 힘을 빌어 제가 자유로와지고 싶었어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신부의 죄사함으로, 보속으로 제가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닌 줄을 잘 알기에, 결국은 스스로 깊은 용서로 풀려나야 해결될 일인 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날도 고해성사를 못한 것 같습니다.
어쨌건 그런 선입견으로 조금은 긴장감을 가지고 그 책을 읽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는 용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더 나아가서는 용서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까지 제시해주고 있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들의 성격구조, 즉 낮은 자존감, 완벽주의, 우울증 등으로 인한 상처들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하느님에게 자기를 맡기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노라니 [우리 속에 숨어있는 힘]을 읽을 때처럼 눈물 콧물이 다 나왔어요. 아니 그때보다 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숨어있는 힘]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쫙 빠져서 한동안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요. 아, 정말 나를 그렇게 맡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책 한 권 읽고 그렇게 되면 정말 성인군자 안될 사람이 없겠죠? 게다가 지금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은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예수라는 단어가 제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전제가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멀었죠?
저는 언제부터인가 불교가 최상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열등한 종교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마치 동양철학에서 도가사상이 우위에 있고 유교는 저급한 사상으로 치부되는 것처럼요. 그게 그런 게 아닌 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는데, 마음으로는 그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성당에 다니는 것도 아직 창피하기도 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성당 가방 메고 성당 가는 모습이 그렇게 한심하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어요.
지난 주에 이 목사님을 서울에서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도 제가 성당에 가는 것은 갈려고 간 게 아니라고 한껏 변명을 늘어놓았댔습니다. 그런 의식의 저변에는 기독교가 제일 잘 되는 나라가 우리 나라라는 것까지도 창피한 마음이 있거든요. 우리 나라 기독교 인구에 한 사람 보태기가 싫었죠. 그런 습이 오래 쌓이다보니, 지난 번 풍경소리 모임 때 그렇게 불편했었나 봅니다. 유치해도 할 수 없네요. 감춰도 유치한 건 유치한 거니까요.
그런데 서울에서 이 목사님과 이야기 나눌 때, 제가 지난 1년 여 동안 어떤 일로 참 비참한 기분이었고, 그게 아직도 극복이 안 돼서 마음에 분노가 가득차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의논을 드리니,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알아보라고 하시네요. 이래저래 올해는 천주교의 하느님이던 개신교의 하나님이던 어느 하느님을 만나기는 만나야 할 것 같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먼저 만나야 하려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용서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과연 종교일까, 그것도 기독교일까 하는 망설임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목사님이 강의 때 나치주의자들이 나치주의가 몸으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나치주의를 신봉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완전히 그 꼴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면 이미 몸으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와있으면서도 그 동안의 관성으로 고집으로 여전히 머리로는 거부하는 그런 꼴 말입니다.
자유로와지는 길이 갈수록 태산이니, 앞으로 넘어야할 고비가 얼마나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보다도 더 험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그 동안은 문제를 피해오느라 무시했지만, 이제 정면으로 맞부딪치려면 온갖 보고싶지 않은 일들, 들추고 싶지 않은 일들과 만나야 될테니까요. 과연 얼마나 마음을 다해서 대면할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만나야겠죠. 정말 다음 생애에는 더 이상 고통받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가 저의 문제와 잘 만나게 기도해주세요. 2003년 5월 5일 어린이날 밤에...

추신 : 이 글을 다 쓴 후에 <풍경소리> 5월호를 받아보았습니다. 「인생에서 배운다」에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또 한번 동시성을 경험한 셈입니다. 거기 이런 말이 있네요.
“죄의식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어두운 부분에다 우리를 묶어놓는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 부끄러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관계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못난 부분이 이 죄의식을 먹여 살린다. 나태함(강조 인용자)이 그것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 그에 대한 치유책은 직접 행동을 하는 것이고 우리의 느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책 두 권을 통곡을 하면서 읽었는데도 행동은 아직 안 나오는군요. 그 느낌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만, 아직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고 보면 어쩌면 저의 가장 큰 죄는 행동하지 않는 나태함인지 모르겠어요.
*고쳐주세요 : 5월호 제 글 122쪽 아래에서 7째줄부터 세 줄이 꼬였어요. 고친 글은 “그로부터 30여 년 후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일상의 삶에 회의하던 로라 브라운은 아들 하나를 두고 둘째 아이를 임신 중에 자살을 기도했으나 포기하고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가출해요.” 입니다.(유영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