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觀玉片紙(49)]오늘 밤 너 죽는다
49호) [觀玉片紙(49)]오늘 밤 너 죽는다
  • 관옥편지
  • 승인 2004.04.0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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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玉片紙(49)]

오늘 밤 너 죽는다


엘리사벳 복녀의 가르침에 따르면, 침묵에는 언어의 침묵, 의지의 침묵, 존재의 침묵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언어의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침묵’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냥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침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싸움 끝에 골이 나서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천주교에는 일정 기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피정이 있어서 ‘묵언피정’이라고들 하나봅니다.
요즘처럼 말이 많고 그래서 더욱 복잡해지는 세상에서는 기간을 정해두고 일절 말하지 않는 피정 방법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한 두 번 시늉이나마 해본 경험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손짓 발짓에 필기까지 동원하여 할 말 다하고 지냈으니 그걸 무슨 묵언 피정이라고 하겠습니까만.)
그 다음 단계 침묵이 의지의 침묵이라는 것인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이 한 번 생애를 걸고 시도해볼 만한 과제이지 싶습니다. 의지의 침묵은 말 그대로 모든 의지(무엇을 해보겠다는 뜻)를 침묵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의지 자체를 품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무 생각도 뜻도 없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의지를 침묵시키는 것은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있지도 않은 의지를 어떻게 침묵시킬 수 있겠어요? 진정 아무런 의지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목석이지 사람입니까?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건 그에게 작든 크든 무엇을 하겠다는 (하고 싶다는)의지가 살아 있다는 말 아니겠어요?
‘침묵’이란, 무엇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언어의 침묵은 말이 발음(發音)되지 않는 것이고 의지의 침묵은 의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요. 속에 담고만 있는 겁니다. 아니면, 게쎄마니에서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자기 뜻(생각, 의지)을 스스로 비워버리는 거예요. 그것이 침묵입니다.

길벗 여러분. 어떻게들 지내십니까?
저는 요즘 저의 뜻과 생각을 침묵시킨다는 게, 그게 말은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쩌면 제가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시도’라고 했나요? 내 뜻을 침묵시키겠다는 뜻을 품었다는 말 아닙니까? 허어, 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것이 제가 세상에 와서 배워야 할 마지막 과목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긴장이 되곤 합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이 한 마디가 예수님의 생애를 관통한 유일원리(唯一原理)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삶은 바로 이 한 마디의 완벽한 실현이었지요. 그 분의 삶과 죽음은 당신 뜻을 포기한 것이면서 당신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침묵’의 오묘한 맛이 있다고 봅니다.
공자님은 네 가지가 없으셨다지요. 무의(無意), 무필(無必), 무고(無固)에 무아(無我)라, ‘뜻’이 없고 ‘반드시’가 없고 ‘굳어짐’이 없고 그리고 마침내 ‘나’가 없으셨다는 겁니다. 무필, 무고는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고 또 웬만큼 애쓰면 시늉이나마 낼 수 있겠다 싶습니다만 무의, 무아는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실현은 거의 불가능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엘리사벳 복녀가 말하는 의지의 침묵을 제대로 한다면 그것이 공자의 무의(無意)와 같은 경지에 드는 것일까요?
아무튼 저는 이 과목에 낙제하지 않도록 면밀하게 깨어 있으면서 성실하게 연습 또 연습을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해봅니다. 제가 제 뜻을 조금이라도 세우면, 그것을 저 스스로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제 뜻에 동의해버리십니다. 이점에서 그분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조금도 빈틈이 없으십니다.
의지를 침묵시키려면 우선 자기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아야겠지요. 그런 다음, 그 뜻을 하느님 뜻 앞에서 비우는 거예요. 그게 침묵이고, 바로 그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숲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숲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해왔습니다. 바야흐로 숲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만, 아직 숲의 문턱에 들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숲으로 들어가겠다는 제 의지를 말끔히 비우는 것입니다. 숲으로 들어가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지는 제법 되었어요. 그런 기도는 안 합니다.(제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는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 의지를 비운다는 게 저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 속수무책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참 난감해 있는데 문득 들리는 선생님 음성 한 마디.
“시간이 없다. 오늘 밤 너 죽는다. 어쩌려느냐?”
그것은 저의 갈팡질팡을 한꺼번에 끝내주는 너무나도 통렬한 펀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밤으로 죽는데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움켜잡고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숲으로 들어간들 그것이 무엇이며 못 들어간들 또한 그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기, 그것이 저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황금열쇠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다시 원점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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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세 가지 침묵 가운데 마지막 침묵인 ‘존재의 침묵’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드리지 않았군요. 그것은 엘리사벳 복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명할 말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공자님의 무아(無我)나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것이 존재의 침묵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그저 그런 경지가 있나보다 어기고, 저로서는 무의공부(無意工夫)에나 정진할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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