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IT 강국의 기막힌 정리해고
시론> IT 강국의 기막힌 정리해고
  • 김동춘교수
  • 승인 2006.03.16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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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려고 옷을 입고 휴대폰을 챙기려던 중 “귀하는 인사 규정 00조에 의거 0월 0일 부로 직위해제되었음을 통보함”이라는 문제 메시지를 확인하였다면 어떤 심정을 갖게 되겠는가? 어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사람들이라면 “아, 이런 첨단기기가 해고 통지서로 활용될 수도 있구나. 역시 우리나라는 IT 분야에서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야”라고 감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 사랑하는 가족이 오늘 내일 먹어야할 찬거리와 아이들 학원비, 주택 대출금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그 메시지는 저승사자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저승사자의 호출명령을 드디어 휴대폰으로 받게 되었다!

최근 파업 중인 외환카드, 기륭전자 등의 사업체에서도 일부 정규 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하지만, 사실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정리해고 예고, 희망퇴직 신청은 물론 해고까지 통보하는 것은 이미 2.3 년 전부터 서울의 여러 파견 용역 회사에서 널리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해고통보를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하다니

그러다가 이번에 철도공사의 자회사인 철도유통(구 홍익회)은 파업중인 KTX 여승무원 70명에게 이런 방식으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한다. 해고자들이 공사 측에 몰려가 항의하자 공사는 우리 소관사항이 아니며 철도유통 측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형식상 별개의 회사이고 공사가 고용주가 아니므로 해고자들은 공사 측에 항의해봐야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은 뻔하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해고자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채 부담없이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편리한 수단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직장인에게 해고는 바로 ‘사형선고’ 그 자체다. 영어로도 ‘fired’는 곧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모가지’ 즉 죽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세상에서 굶어죽을 상태에 놓이는 것과 총 맞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것처럼 타인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가져올 해고조치를 대단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죽을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에 그의 죄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사와 재판 절차가 마련되고, 당사자의 충분한 항변은 물론 변호사의 조력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현대 민주사회 법치주의의 원리이듯이, 정리해고 시에도 기존의 근로기준법은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치도록 해 놓았고, 노조가 있는 회사의 단체협약안에서는 이것을 매우 자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우리 근로기준법 30조에는 “정당한 근거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고 되어 있지만 ‘계약직’으로 알려진 비정규직에게는 이러한 법이 사치에 속한다. 즉 근로계약서나 인사규정에 사용자가 해고할 수 있는 사유를 아무리 분명하게 적시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조치를 당하는 사람의 항변하나 듣지 못하고, 징계위원회 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일정기간의 예고도 거치지 않은 채 한 사람의 생명줄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치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를 서면도 아닌 휴대폰의 문자로 대신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한 일터 구성원을 그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나

백보양보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기업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용자의 ‘의사’가 해고 결정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일터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가 이런 방식으로 그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은 시장경제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시장경제의 최초의 주창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해고조치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자신의 시장경제론은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고 외칠 것이다.

기업이 살자는 것도, 경제를 살리자는 것도, 성장을 지속시키자는 것도 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다수가 좀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업, 다수, 혹은 전체의 경제를 위해 소수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나야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소수를 그런 방식으로 물건이나 짐승처럼 취급한 다음 과연 다수가 잘 살 수 있는 경제가 만들어질지도 의문이다. 아무리 돈 벌기 위한 조직이라지만, 종업원을 이렇게 대하는 기업이나 사용자가 과연 일류 기업의 일류경영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며, 이러한 정책을 묵인, 정당화하는 국가나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동의나 헌신을 이끌어내는 선진국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IT강국 한국이 노동자를 대함에서 비인간화의 최선두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 글쓴이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및 NGO 학과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및 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
· 서울대 사범대와 동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음
· 참여연대 정책위원장(2000-2001)
· 참여사회연구소장(2002)
· 저서 : 〈NGO란 무엇인가〉
           〈근대의 그늘〉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등
    
 
2006. 3. 16  / 김동춘교수 

* 이 글은 다산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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