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포럼> 안타깝고 안쓰럽다
다산포럼> 안타깝고 안쓰럽다
  • 정지창교수
  • 승인 2006.07.04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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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쿼터가 반으로 축소되는 7월 1일을 기해 영화인들이 발표한 성명서를 읽다가 “수시로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도 우회전하는 상습적 교통법규 위반죄”라는 구절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라크 파병과 전략적 유연성 수용,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추진 등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촌철살인의 비판이라는 느낌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우회전하는 대통령

이 성명서는 또 “‘자신감 주입’과 ‘쇼크 요법’ 두 가지로 환자를 잡는 무면허 의료시술죄”를 저질렀다고 노대통령을 고발하고 있다. 역시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실감되는 요즘 세태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지지했던 나로서는 최근의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를 당한 것이 안타깝고 안쓰럽기만 하다. 그러나 앞에서 열거한 문제들을 비롯하여 스크린 쿼터 축소, 천성산 관통 터널, 새만금 사업, 쌀 협상,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이르기까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도 ‘비판적 지지’의 근거를 제시하기가 난감해진 것이 사실이다.

말로는 요란하게 진보와 자주와 개혁을 표방했고, 그래서 보수 신문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참여정부가 가장 친미 보수적인 정책으로 우회전할 때마다 나 같은 지지자들은 할 말을 잃고 좌절감과 허무주의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진보와 개혁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젊음과 순정을 바친 운동가들이 사기꾼으로 매도되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게다가 역사의 진보를 혐오하고 부정하는 일반 대중의 정서는 각종 선거의 야당 압승과 여론조사의 수치로 나타나 개혁의 의지를 꺾어놓기 일쑤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시계 바늘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수구보수적인 세력을 지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0대 청소년에서 50대 장년에 이르기까지 군사 독재 치하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눈치 보며 움츠려 지낸 세월을 되돌아보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악몽이다. 만기제대한 후 다시 영장을 받는 꿈을 꾸거나, 재수생이 다시 입학시험을 보는 꿈을 다시 꾸고 싶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지금 대중의 정서로는 말로만 진보·자주적이고 실제로는 보수적인 정부보다는 말로는 보수적이고 친미적인 척하면서 실제 정책상으로는 좀 진보적이고 자주적인 정부가 더 믿음직하게 보일 것이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우회전하는 차보다는 우회전 깜박이를 넣고 직진하는 차가 덜 혼란스럽고 교통사고의 위험도 적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비상등를 켜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신호등이고 뭐고 무시하면서 앞으로만 질주하는 폭주 자동차의 효율성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깜박이를 켜고 머뭇거리는 차는 답답하고 비능률적이라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성명서도 정치인이나 언론인들보다는 영화인들이 더 세련되고 멋지게 써내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세상이 그만큼 달라지고 진보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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