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서부권역 의제21 위원들과 함께한 제주도 생태 탐사
경기서부권역 의제21 위원들과 함께한 제주도 생태 탐사
  • 이승봉기자
  • 승인 2006.07.10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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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경기 21에서 후원하고 경기서부권역 기초의제에서 마련한 위원연수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생태 탐사가 있었다. 이들과 함께한 제주 생태탐사 체험은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안내는 제주시 의제21 사무국장이 담당하였다. 그 내용을 광명시민신문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한다. 

연화못 

▲ 연화못에설치된 관찰로

애월읍 하가리 자리하고 있는 연화못은 과거 도적의 소굴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그들을 소탕하고 연못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내봉이란 오름 아래 자리한 오래된 연못으로 고려 충렬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붉은 수련이 피어있다.

면적은 대략 5,000평 정도되며 원래는 해안돠 연결되어 있었고 6개의 크고 작은 연못과 배후 습지로 이뤈져 있다. 지금은 바다와 단절되었으며 몇 개의 연못과 습지가 매립되어 있는 실정이다. 



▲ 꽃대를 수줍게 감추고 있는 연잎들

주요 식물은 연꽃과 갈대, 버드나무, 흑삼릉, 수련 등이다. 동물로는 흰빰검둥오리와 쇠물닭, 백로 류, 논병아리, 뱀장어, 붕어, 미꾸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귀화 동물인 외래종 자라, 붉은귀거북, 블루길 등이 인위적으로 방류되어 생태계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 



▲ 연화 못에 서식하는 생물들을 채집해보았다.

7월이면 연꽃이 만발하여 북제주군에서 관찰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난대림지대

▲ 난대림 관찰로를 오르고 있는 위원들

납읍 난대림지대는 북제주군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서 주민들이 금산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지켜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34,000평방미터 면적에 난대림으로 덮인 식물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원식생 연구에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학술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 빽빽한 숲으로 낮인데도 어둑 어둑하다.

납읍은 예로부터 양반촌(班村)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난대림지대는 예로부터 이 마을의 문인들이 시를 짓거나 담소를 나누는 휴양지로서 이용되었기 때문에, 경작지와 인가가 주위에 있으나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숲 안에 마을의 제를 지내는 '포제단'이 있어 신성시 돼 온 영향도 크다고 생각된다. 



▲ 나무들은 이끼류와 덩쿨 식물들로 덮여있다.

이곳의 식생은 주로 후박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등이 상층목을 이루고, 하층에는 자금우, 마삭줄, 콩짜개란 등이 전면을 덮고 있으며, 송악이 상층목의 수관(樹冠)을 감아 올라가고 있다. 나무의 종류는 비교적 단순하나 전형적인 난대림상을 이루고 있다. 



▲ 제장 정면에 위치한 서신단 

공원 안에는 부락제를 지내던 포제단과 민속박물관이 있다. 제장 정면(북쪽)에 홍역신을 모시는 서신단(西神壇)과 부락수호신을 모시는 토신단(土神壇)이 놓여 있고, 객신(客神)으로 인물재해지신(人物災害之神)을 위한 포신단( 神壇)이 오른 쪽에 놓여 있다. 행제(行祭) 순서는 토신, 포신, 서신 순으로 한다. 과거에는 정월과 7월에 두차례 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방산

▲ 산방산은 제주도에서도 제일 먼저 생긴지역으로 단단한 암석으로 되어 있다.

산방산(山房山)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동쪽 화순해안에 높이 395m, 직경 약 1200m로 수려한 용모가 찾는 이의 눈길을 단번에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다. 제주도의 다른 산과는 달리 정상에 분화구가 없고 마치 투구 모양으로 풍화된 조면암주를 포개 세워놓은 듯한 절벽으로 절벽과 정상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산의 서남쪽 중턱에 길이 10m, 너비 5m, 높이 5m되는 산방굴사(山房窟寺)가 있고 천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굴 안에 고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수도승들이 불상을 모셔놓고 수도했다는 곳으로 고려말 고승 혜일도 산방법승이라 하여 이곳에서 수도했다.
이 천장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방산의 암벽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굴 앞에는 백년이 된 듯한 거송이 수문장같이 버텨 서있고 수평선 멀리 형제섬, 가파도와 최남단 마라도가 아련히 보이며 석양에 물드는 해안의 경관은 감탄사를 연발하기 충분하다.

▲ 송악산 쪽에서 바라 본 산방산

전설에 의하면 산방산은 원래 한라산의 봉우리였다고 한다.
옛날 어떤 사냥꾼이 한라산에 사슴을 잡으러 갔다. 활을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사슴이 안 잡히는 바람에 정상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사냥꾼은 드디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급히 활을 치켜들어 서두르는 바람에 잘못하여 활끝으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한라산의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 내던진 봉우리가 날아와 앉은 것이 산방산이고, 뽑아 버린 곳은 백록담이 되었다.

▲  대정 향교에서 본 산방산

산방산암벽식물지대는 면적이 24만㎡이며 1993년에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되었다. 험한 암벽에는 지네발란, 풍란, 석곡 등이 자라며 특히 지네발란은 우리나라에는 이곳에만 자생하고 있는 희귀식물이다.
산 위에는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육박나무, 참식나무, 생달나무 등이 자라 난대림의 극상을 이루고 있고, 제주 유일의 섬회양목 자생지로 알려져 있으나 관상용으로 캐가서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용머리해안



▲  산방산 앞에서 본 용머리 해안. 하멜이 표류한 곳으로 유명하다.

제주도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동쪽에 화순 해안이 위치해 있다. 용머리 지역은 높이가 40m에 약 300m 길이로 해안에서 돌출된 분석구로서 화산쇄설물로 구성되어 있는 본층이 퇴적 당시에 있었던 부분적인 화산활동에 의하여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산방산과 일출봉과도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퇴적 당시의 성층면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고 그 층 사이에 각종 크기의 해저 응회암과 현무암의 역들이 협재되어 있어 경연의 차이에 따라 침식 작용을 받아 소규모적인 해식동과 파식대가 발달하였다.

▲  화순 해안에서 본 용머리 해안

용머리해안은 해안의 언덕 모양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용머리가 왕이 나타날 훌륭한 형세임을 알아차린 진시황이 호종단을 보내어 용의 꼬리와 등을 칼로 끊어버렸는데 이때 피가 흐르고 산방산의 괴로운 울음소리가 여러 날 이어졌다고 한다. 겉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좁은 통로를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수천만년 동안 층층이 쌓인 사암층 암벽이 절경을 이루며 경탄이 절로 나온다.


화순해안 사구지대

▲  화순 해안의 검은 모래. 화산재로 만들어진 모래다.

만여 평의 검은 모래사장을 자랑하는 화순해수욕장은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에 위치해 있다. 수천만년 동안 화산재가 쌓여 사구지대와 응회암 언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뚝선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이 서쪽 해안선을 감싸안고 있으며 확 트인 바다엔 형제섬이 다정한 모습이다. 특히 한라산에서 흘러든 시원하고 깨끗한 용천수가 해안 곳곳에서 솟아올라 이곳에서는 해수와 담수욕을 모두 즐길 수 담수가 흘러드는 모래사장 쪽으로는 화순항이 있어 제주 바다의 절경과 잘 조화를 이룬다.



▲  화순해안의 응회암 층

그런데 지난 2002년 이곳 해안에 해군이 8,0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제주도남방해역의 해군함정을 근접 지원할 수 있는 접안시설과 군사지원 기능을 갖춘 군항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시민사회단체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송악산

▲  이중 분화구를 가진 소악산을 관찰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다.

'오름'으로 이름이 붙는 제주도 산들과는 달리 송악산은 제주도에서 몇 안 되는 산중의 하나다. 99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고 해서 99봉이라는 별칭도 있다. 송악산은 해돋이와 일몰, 일출과 석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송악산은 화구구인 알오름을 갖고 있는 소위 이중식화산체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주변 지질이 특이하여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 2만 5천년 전의 화산 폭발로 생긴 제 1분화구

제1 분화구는 비교적 규모가 큰 응회환 분화구로 그 직경이 약 500m, 둘레가 약 1.7km나 되며 침식이 많이 진전되어 있다. 제2분화구는 제1분화구내의 화구로서 둘레가 약 400m, 깊이가 69m로 그 경사각이 평균 70도에 달하여 거의 수직경사를 나타내고 있다.



▲ 제1분화구 안에 솟은 바위 위에 염소가 조각상처럼 서있다.

송악산은 응회환(tuff ring)과 화구중앙에 분석화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구구라고 할 수 있는 송악산의 정상인 분화구는 깊이 69m로 분화활동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곳이다. 응회환의 외륜은 북쪽의 1/4 정도만 남아 있고 그사이에 화구원이 뚜렷하며,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남쪽은 외륜이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소멸되어 해안절벽을 이루고 있다.



▲ 2개의 분화구 사이에서 사진 한장. 뒤가 1천년전에 터져 생긴 제2분화구

단성의 이중식화산의 형성과정은 간단히 말해서 화구가 물과의 접촉이 용이한 곳, 예로서 얕은 바다, 해안선 부근, 늪지, 호수, 고하천 부근, 지하수 공급가능지 등에서 물과 마그마의 접촉으로 수증기성 분화활동을 하며, 그 주변이 얕은 바다일 경우에는 해양성 퇴적작용을 한다. 송악산의 응회환의 퇴적장소는 내만과 같은 아주 얕은 바다나 해안선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증거는 응회환의 퇴적노두 단면의 퇴적환경 분석에 의해서 쉽게 알 수 있다.

▲ 산위에서 바라 본 송악산 전망대 

송악산에는 일본이 중국 침략전의 발판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의 최후지점으로 삼았던 곳으로, 중국 도양 폭격을 목적으로 건설했던 비행장, 고사포대와 포진지, 비행기 격납고 잔해가 콘크리트 토치가처럼 산재해 있고, 산이수동 해안가의 송악산 응회환 퇴적층 해안단애의 절벽 아래에는 해안참호가 15개소 있으며, 이중 4~5개소는 자연 붕괴되어 낙반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해안절벽을 이용하여 굴을 축조했다는 독특한 형태 때문에 보존가치가 높다.


추사적거지

▲ 추사 적거지 앞에 자리한 하루방 2기

대정읍 보성리에 위치한 대정현 성지내에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제주 유배시에 살았던 집을 복원한 초가와 추사기념관이 있다.
건물 입구에는 대정사람들의 성격을 닮은 대정성문 앞에 세워져 있던 돌하르방 2기가 떡 버티고 있으며, 터널형의 조그만 현대식 건물을 지나면 추사김정희선생 적거유허비가 나타나고, 건물안으로 들어서면 추사의 글씨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전시된 것들은 추사의 진품글씨는 몇개 없고 대부분 영인본들이다.
유허비를 지나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넘어 들어서면 제주의 전통초가의 구조를 볼 수 있고 정식대문의 형식을 갖춘 이문간과 연결된, 들어서면서 왼편에 위치한 모커리의 돌화로가 놓인 작은 방이 추사 김정희선생이 머물던 방이다.

▲ 후손들의 진술에 따라 복원한 적거지

제주는 조선 말기까지 많은 중죄인들의 유배되는 유배지였다.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열악한 상황의 조건들은 거의 사형에 가까운 대역죄인들의 유배지가 되기에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제주로 유배된 사람들 중에도 중대한 대역죄인 즉 정치범들은  대부분 대정현 지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정치범이란 소위 말하는 반정부인사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최고 엘리트 유배인들이라 제주인들은 이들에게 교육받거나 줄을 대려는 노력들을 했다고 한다. 이들이 언제 또다시 중앙정치무대에 다시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유배인들과의 교류는 이쪽지역의 사람들의 반정부적 정치의식을 고취시켰다고 보여지며, 그것은 제주에서 발생된 조선후기 민란들의 주 발원지가 대정현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유배지인 제주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선생도 이 지역에서 지역사람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심지어는 제주목(현재의 제주시)에서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임에도 교육을 받고자 이곳까지 오고 갔다고 한다.

▲ 추사김정희선생 적거유허비

또한 추사 김정희선생은 그 유명한 추사체를 제주에서 완성하였다고 하며, 만일 추사가 제주로 유배를 오지 안했다면 지금의 추사체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유배생활은 그의 학문을 완성시키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추사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추사기념관에 전시된 추사의 글씨들을 살펴보는 것과 더불어 제주의 전통초가구조에 대해서도 살펴볼 기회도 가질 수 있으며, 겨울철이라면 추사가 그렇게 좋아했던 울타리 밑에서 피어오르는 수선화의 향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정 향교

▲ 대정향교 대성전 모습

대정향교는 사계리 단산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모델이 된 듯한 노송이 향교내에 서 있는데 지난 1971년 제주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1416년(태종 16) 대정성(大靜城) 안에 건립된 후 몇 차례 옮겨 지었다가 1653년(효종 4)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였다. 명륜당・대성전・동재・서재・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에 전퇴가 있는 5량 집으로, 1835년(헌종 1)에 중건되었다.



▲ 현무암으로 쌓은 벽들과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명륜당은 1772년(영조 48) 중건된 정면 5칸의 건물로, 전후 좌우퇴로 된 평면의 굴도리집이다. 단청하지 않은 간결한 장식이 강건한 느낌이다. 편액은 1811년(순조 11) 현감 변경붕이 썼고, 의문당은 1864년(고종 1) 이곳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 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며, 매년 4월과 9월에 석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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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인 2006-07-12 10:19:33
사진기를 좋은걸 써서 더 선명하게..

이런..@.@ 2006-07-11 13:57:16
한 눈에 다 볼 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