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사람들> 철산3동 청소년공부방 임선희선생
광명사람들> 철산3동 청소년공부방 임선희선생
  • 양정현기자
  • 승인 2004.07.30 10:29
  •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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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사람들> 철산3동 청소년공부방

 다시 시작하는 마흔살, 임선희선생님

 

 

 

▲ 노조간부로, 책판매왕으로, 지금은 공부방 선생님으로 일하는 임선희씨

 

임선희 선생님의 현재 직함은 철산3동 청소년 공부방의 담당 선생님이다. 진이, 진영이, 종혁이 세아이의 어머니이고  남편은 보건의료노조의 간부이다. 12시 이전에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다. 그렇지만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럽다고 한다. 남편을 이해할 수 있는건 보통의 주부와는 다른 인생의 출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 핀꽃 '노동조합'

 

임선희 선생님은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경상도 유교적인 집안에서 임선희 하면 모범생으로 통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재수하러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입시보다는 작은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과학서적과 사회현실에 더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사회현실의 모순을 느끼면서 모범생에서 어긋난 인생의 출발점을 내딛었다. 82년 구로공단의 삼일실업에 취직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몇사람이 노조준비모임을 만들면서 85년에 해고를 당했다.

이후 출근투쟁과 법정투쟁을 거치며 평범한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노동자는 보잘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하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조합활동은 자신의 가슴속에 핀 꽃이라고 한다. 그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26살이 되던해 그야말로 베게하나 이불하나 들고 집을 나왔다.  

구로공단의 동방전자에 재입사 하면서 다시 노조준비모임을 만들어 또 다시 해고 되었다. 당시 노조준비모임을 하던 야간고등학교 학생들과 같이 디딤돌 교회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교회에서 노동자야학을 하고 있는 남편을 만났다.

27살에 집안에서는 이제 그만 속썩이고 결혼 하라고 난리였다.  주변의 평판이 좋아 현재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서 부부가 이제부터 더 열심히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89년에 결혼을 하면서 광명시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동시에 구로1공단의 재단사로 입사한다. 주공1단지 꼭대기에서 첫 딸 진이를 데리고 출근하며 공단의 어린이집에 맡기고 퇴근후 진이를 업고 1단지까지 걸어다녔다. 살아오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 어린이집에서 통먹지 않던 우유를 집에만 오면 두병씩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장녀답게 커서 부모를 가장 잘 이해한다.

 

판매왕 임선희

 

둘째딸 임신후 탁아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로에 있던 새터어린이집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보육교사 자격증도 땄다.

이후 살고 있던 집에서 놀이방도 운영해 봤다.

당시에는 생활이 어려워 아이들에게 책을 사주고 싶어도 책을 사줄 돈이 없었다. 돈이 생겨 책을사러 갔다가 철산동에 있는 웅진출판에 입사하게 되었다.

임선희 선생님은 이때 인생의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업을 자신이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웅진에 입사하자마자 둘째딸 진영이를 업고 광명시를 종횡무진 뛰었다. 6개월만에 팀장이 되었고 3년만에 지부장이 되었다.

 

 임선희 선생은 자신의 성공이유를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노동운동이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만남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책을 팔지만 어려운 곳에 후원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주부들이 어려움을 겪으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도와주었다. 좋은 교육이 있으면 영업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을 참여시켰다. 지부장이 되기전까지는 한번도 화장을 한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열심히 사람을 만났다.


덕분에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영업을 통해서 얻은 것은 뭘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사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망설였던 일을 벌렸다.

 

현재 임선희 선생은 광명경실련에서 운영하는 철산3동 청소년 공부방의 책임 선생님이다. 지역의 중학생 아이들과 생활한다. 자신이 하는 일은 늘 성에 안찬다고 한다. 좀더 의미있는 일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공부방을 택하게 된것은 셋째 아이 종혁이를 낳고 나서부터이다.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가족과 사회에서의 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전환점을 가지고 싶어서였다.

이전부터 탁아운동과 방과후 교실에 관심이 있었다. 오랫동안 망설였던 일을 지금에서야 시작하게 된것이다.

물론 자신의 타고난 영업기질 때문에 많이 붙잡았지만 새로운 일이 안생기면 영업에 더 붙잡힐것 같았다.

임선희 선생님은 지금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지역의 조금더 어려운 청소년을 찾기 위해 학교선생님, 동사무소 복지사, 복지관을 마구 찾아다닌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성에 차질 않는다. 한참을 더 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공부방을 하면서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우선은 아이들과 대화 할 수 있어서 좋다.

남편은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임선희 선생은 내몫까지 두배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부부사이에는 서로 도와주고 절대로 외롭고 쓸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부부관계의 지론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파병반대 집회에서 예전에 불렀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내나이 마흔살에는 조금 더 의미있는 일을 찾아 즐기면서 일하고 싶다." 임선희선생의 소박한 바램이다.

 

 

  

<2004. 7. 30  양정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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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화 2004-12-11 11:03:26
등뒤로 스며드는 겨울 바람 속에서도 예쁜 눈망울들의 가르침에
가슴으로 감사 드립니다.
정열적으로 살다 보면 좋은일도 있을것입니다

오마르 2004-07-30 10:29:56
요리도 잘하신 답니다...

지인 2004-07-30 10:29:56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으셨군요. 늘 바쁘게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허정규 2004-07-30 10:29:56
떡뽁이 요리 등등 음식의 달인이지요^.^

지인2 2004-07-30 10:29:56
철산3동 청소년공부방에 가면 청소년만 있는게 아닙니다. 자원봉사를 하시는 주부, 직장인, 대학생 등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지요.. 물론 임선희 선생님 음식솜씨도 일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