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은 무늬만 평화,개혁 세력인가?
여당은 무늬만 평화,개혁 세력인가?
  • 정욱식대표
  • 승인 2004.06.18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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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은 무늬만 평화,개혁 세력인가?


이라크 추가파병을 둘러싼 열린우리당의 '갈 지(之)자 행보'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추가파병 요청을 받았을 때인 연말 연초에는 진통 끝에 '전투병 파병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 그러나 추가파병 동의안 표결이 있었던 2월에는 '정신적 여당'을 운운하면서 슬그머니 추가파병 승인으로 당론을 바꿔버렸다. 평화개혁 세력을 자임하던 열린우리당의 중대한 정체성 위기였다.

그러나 탄핵 정국으로 파병 문제가 가려지면서 열린우리당은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에 힘입어 4·15총선에서 제1당이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4·15 총선 이후 이라크의 유혈사태가 악화되고 이라크 포로 학대 파문이 불거지면서 파병 문제는 17대 국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추악한 전쟁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추가파병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추가파병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열린우리당 내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마련한 '이라크 파병 원점재검토 요구 결의안'에 열린우리당 의원 67명을 비롯한 90명이 서명하면서 추가파병 문제가 재검토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린우리당의 행보에 대해 청와대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이에 당 지도부가 파병신중파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설득하면서 이들은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원점 재검토 요구안에 서명한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은 "파병 철회를 포함한 원점재검토에 동의한 것이 아니다"면서 발빼기 조짐을 보이고 있고, 당내 일각에서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추가파병을 정당화하려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 역시 각양각색이다. 서명에 참여했던 일부 의원들은 "원점 재검토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었다며 파병의 규모와 성격, 일정을 다시 논의해보자는 취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병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일정을 재검토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추가 파병안이 강행되는 것은 일단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자기합리화로밖에 볼 수 없다.

또한 김부겸 당의장 비서실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추가파병안은 국회동의를 거쳐 예산까지 정부의 자유재량에 넘겼고, 재검토 결의안은 법적 효력이 없으며, 여당으로서 정부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파병 신중론을 펼치고 있는 의원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동의안에 예산안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국회에 예산심의 권한을 부여한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재검토 결의안이 법적 효력이 없다면 '특별법'과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으며, 여당의 역할이 정부를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알맹이 빠진 파병 당정 협의

추가파병과 관련해 오락가락 행보를 계속 해온 열린우리당은 이라크 현지 조사단을 비롯한 정부관계자들과 접촉을 계속 가지면서 다음주 중으로 당론을 정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파병 논란과 관련해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왜 쿠르드 자치지역인 아르빌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아르빌이 이라크에서 가장 안정화된 지역이기 때문에 평화재건 임무에 적합한 지역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는 한마디로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아르빌 등 쿠르드 자치 지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미영 연합군이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으로 지정해 후세인 세력의 유입을 차단한 사실상의 독립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쿠르드 자치지역은 이번 전쟁의 화마(火魔)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역에 '전후복구와 평화재건'을 위해 간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군의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의 파병은 '부시 체면 살려주기'라는 정치적 요식 행위가 되고 있다. 추악하고 더러운 전쟁으로 전락하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잇따른 파병국들의 철군 선언 속에서 한국의 파병은 이라크 안정화라는 실질적인 효과와 관계없이 부시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9일 미국이 유엔 안보리 이사국의 만장일치로 새로운 결의안 통과를 관철시킨 데 이어 한국이 추가파병까지 해주면, 대선을 앞두고 이라크 수렁에 빠진 부시 행정부에게는 힘이 될 것이다. 한국군이 '이라크 평화재건군'은 고사하고 '부시 재선 지원군'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쿠르드 자치지역인 아르빌로의 파병 강행시, 최악의, 그러나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는 한국이 아랍-쿠르드 사이의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라크 북부 지역은 독립국가 건설을 원하는 쿠르드족과 분리 독립을 저지하려는 아랍계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벌써부터 쿠르드족과 수니-시아파 사이의 충돌과 반목이 발생하고 있고, 6월 30일로 예정된 정권이양 이후에는 더욱 첨예한 종족 갈등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도 잇따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최근 유엔의 이라크 결의안에 쿠르드족의 자치를 보장했던 임시헌법에 대한 언급이 없자, 쿠르드족이 임시정부와 총선 참여 거부를 선언하는 등 강력 반발, 쿠르드-시아파간 종족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쿠르드족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쿠드르족은 터키에 1300만명을 비롯해 이란에 500만명, 시리아에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은 대(大) 쿠르디스탄 건설을 원하고 있는 반면에, 터키, 이란, 시리아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전쟁도 치르지 않은 지역인 쿠르드 자치지역에 발을 들여놓을 경우, 아랍세계의 반한감정을 고조시키고 분쟁에 휘말릴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과 정부의 당정협의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저 한미관계, 당정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참여정부는 미국을 의식해 명분도 실리도 없는 추가파병을 강행하려고 하고, 열린우리당은 정부와의 관계를 의식해 사실상 이를 추인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혁명'을 통해 대통령이 되고 제1당이 되었다면서 정작 과반수가 넘은 국민 여론에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찌되었든 정부가 추가파병을 미국에 약속했고 국회에서 이를 동의해준 만큼 이를 철회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많은 국가들이 이라크의 상황 변화와 미국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 조작 및 포로 학대에 분노하면서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있는데, 왜 한국 정부와 국회만 미국과의 약속을 운운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인가?

이제 열린우리당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공약 사항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의 사실상 철회에 이어 이라크 추가파병마저 속절없이 내준다면 '평화개혁세력'이라는 것은 말 그래도 '무늬'만 남게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대오각성 해야 한다. 추가파병 철회시 부작용만 생각하지 말고, 파병 강행시 예상되는 혼란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론에 귀를 열면서 말이다.

정욱식/2004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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