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청룡사 법운 스님
조계종 청룡사 법운 스님
  • 이재길기자
  • 승인 2004.08.3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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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보시하라!  인생은 연기이니 서로 사랑하라!
- 40년간 방생 지속해 


                대한불교조계종 청룡사 전경


도올 김용옥은 달라이 라마의 말을 빌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본다. 인간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에서 오는 절망과 불안, 고통 그리고 끊임없는 번뇌에 시달린다. 이러한 현상은 곧 나의 자화상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에서 답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거니와, 불교는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이다. <법구경>은 불교를 가장 정확하게 규정하는데, ‘착한 일하라’, ‘악한 일 하지 마라’, ‘마음을 깨끗하게 가져라’다.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다. 법운 스님도 다르지 않았다.


이상세계 찾아 20대에 출가

불교의 스님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중생 제도를 위해 포교하는 출가 수행자들을 일컫는다. 법운 스님은 비구니시다. 법운 스님은 20대에 출가해서 삼보에 귀의했다. 삼귀의는 삼보인 불(佛)-부처님-, 법(法)-진리의 가르침-, 승(僧)-승단-에 지심으로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불자의 맹세를 말한다.
법운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좀 더 이상체계가 있을까’를 고민하고, 교회도 다녀보았지만 세상을 하나로 보던 마음과 맞지 않아 하던 중 불교를 우연히 접했다고 한다. 불교는 마귀, 지옥, 미물 중생조차 크게 하나로 보고 경계가 없어, 한 길 가기로 결단하고 삭발염의 하였다. 당연히 주변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러한 것은 어느 스님이나 겪는 과정이며, 역경이 클수록 발전도 큰 법이라 여겨 속세와 단절한다. 출가는 수난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남이 못 갖는 행복을 스스로 갖는 감상도 갖게 한다.
 그 후 수 십 년 동안 근기로 수행을 생명으로 하여 국태민안, 세계평화, 남북통일 등을 위해 기도함을 멈추지 않고 정념 수행하고 있다. 무릇 종교인은 자기생명처럼 조석으로 기도해야 한다. 종종 큰 사고와 사건을 접하면 본인이 기도에 소홀한 것 같아 자책하고 더 열심히 기도한다고 한다. 

               청룡사를 30년간 섬겨온 법운스님


광명생활 청룡사와 함께 30년 넘겨

광명에는 1975년부터 기거했다. 당시만 해도 광명은 취약지역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천국일 만큼 지속적인 발전이 있었다. 경실련의 역할이 컸다. 광명에서의 생활은 광명 3동에 소재한 태고종 극락사를 당시 큰 돈을 빚내어 인수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청룡사’라는 사찰명은 법운 스님이 어려서부터 청룡을 좋아한데서 비롯되었다. 하늘에는 큰 용이 잘 갈무리하면서 하늘을 움직인다. 그 후 1979년에 신축하면서 그 빚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지만 빚이 있는 상태에서도 계속 복지사업에 힘써 왔다. 어렵지만 내색 안했다. 가진 것 없어 힘들지만 수행 신행의 열매이기에 더 열심 정진 수행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 청룡사

교단은 배움의 터전이다. 조계종은 정통 불교의 본체다. <조계>란 본래 중국 선종의 제 6조인 혜능의 별호이며, <조계종>은 조계 혜능을 법조로 삼고 조계의 선지(禪旨)를 종으로 하는 종파이다. 조계종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북한산에 지금의 조계사(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단이름을 조계종이라 하였다. 청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이자 재단법인 선학원에 적을 두고 있다. 


스님이 되려면?

조계종에서 스님이 되는 과정은 어렵다. 처음 출가하고 나면 행자생활을 사찰에서 1년간 거친 후 행자 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아 사미(사미니)가 되고, 여기서 다시 ‘강원’에서 4년을 공부하고 구족계를 받아 비구(비구니)가 된다. 그러면 삼의일발(三衣一鉢)의 검소한 생활을 하며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 승려들은 세속의 직업을 멀리하고, 경제 행위를 안 하고, 여러 가지 많은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
비구는 250계를, 비구니는 348계를 받아 지켜야 한다. 계(戒)는 악행을 버리고, 생명체에 대해 자비와 화합의 마음을 지니겠다는 정신력을 가리킨다. 율(律)은 '규정'을 말한다. 승가는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려는 비구(니) 스스로가 결의하여 형성된 단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결의에 의해 악을 떠나는 것이 계율의 근본정신이다.
계에는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오. 불음주), 사미계, 구족계가 있다. 법운 스님은 ‘구족계’인 북전의 사분율에 따라 비구니 348계를 송광사 구산 큰 스님에게 받았다. 예를 들어 스님은 몸에 시계나, 목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 등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 계를 따르는 것이다.
스님은 더 나아가 몸도 내 것이 아니라 한다. 벗는 것이 아니니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사에 거래가 없다. 옷을 벗을 줄 아는 자는 다시 옷을 입을 줄도 안다고 한다. 인연법을 알아서 취함이 깨달음의 길이다.


불경

8만4천 대장경이 해인사에 현존한다. 배가 아파서 온 이에게 배 낫게 하고, 머리 아파 오는 이에게 머리 낫게 해주는 의사가 부처님이다. 그 말씀을 수록한 게 경이다. 이게 방편설이다. 굳이 말씀 안 해도 되는데, 뛰어가는 이, 걸어가는 이, 자면서 차타고 가는 이로 나뉘듯 목적지는 같은데 행보가 다른 것은 그 사람의 업연으로부터 이뤄진다. 


40년간 월 1회 씩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방생 계속해 와

인간이 대자연을 무시하고, 탐(貪)진(嗔)치(癡)에 빠지기 쉽다. 탐욕은 색욕(色慾), 재물(財物) 등에 만족 못하고 욕심내는 것이다. 중생의 소유욕이 문제다. 그것이 자연조차 파괴하는 것이다. 진애는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해 불편해 하는 마음이다. 우치는 진리를 분별치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청정심으로 삼독(三毒)의 마음을 멀리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물질문명에 노예가 되어있다. 하지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다. 이생에서 저생으로 돌아갈 때는 인생 역정에서 경험한 상념과 행위만 가지고 간다. 그러므로 자연만물과 상호의존하고 일체의 사물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옛날 대안 스님은 육환장에 방울을 달아서 짚고 다녔다. 금속 소리를 듣고 미물인 생명들이 피하도록 하는 것이다. 불교는 생명 사랑의 종교다. 
법운 스님은 40년 간 월 1회 방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해왔다. 성지순례 나가서 사찰순례하면서도 계곡에서 행하고, 주기적으로 미사리 방생터에서 40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빼먹지 않고 해왔다. 방생(放生)이란 죽음에 직면한 생명을 살려주는 일이다. 이것은 불교의 계율 중 으뜸인 불살생(不殺生)과 자비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다. 수많은 선행(善行) 중에 죽게 된 목숨을 살려주는 일만큼 큰 선행도 없다. 방생은 불살생의 소극성을 넘어 생명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해주는 일이다. 스님은 방생을 확대해 주위의 어려운 이웃과 고통을 나누며, 그들을 위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행하고 있어 수행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윤회

방생을 하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유도 있다. 사람이 윤회를 벗어나려면 이생에서 1인 3역하고, 1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이생에서 천상과 이 세상 그리고 저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오늘 해야 할일을 내일로 미루면 불편이 온다. 그러면 육도에 빠진다. 六道는 중생이 지은 바 업을 따라 받게 되는 과보를 말하며, 천(天),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이 있다. 천상은 성인이 있는 곳이다. 인간은 지은 업에 따라 사람의 개성과 태어나는 환경이 각각 다르게 된다. 아수라는 싸움의 세계다. 이 세상에도 수라도(전쟁, 시기) 세계가 있다. 아귀는 사람이 죽어서 아귀도에 떨어져 고통 받는 상처를 말한다.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고, 먹어도 고통이다. 부자가 병든 것과 같다.
축생은 짐승들이다. 축생은 느낌으로 산다. 이는 무지이다. 알고 지은 죄는 깨달았을 때는 용서 받는다. 모르고 지은 죄는 계속 몰라 구제불능이다. 이로인해 무간 지옥에 빠지기 쉽다. 
육도에서 벗어나려면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이 반야바라밀다에의 길이다. 반야란 위대한 지혜이다. 지상계는 배움의 마당이다. 저 세상에서 배운 것을 교정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


해인사를 크게 짓는 일에 대하여

불교는 마음을 중시한다. 마음은 정신이다. 이 정신 지주처로 전국에 많은 사찰이 있지만 대표적인 곳이‘해인사’다. 그러므로 해인사는 성스럽고 맑고 깨끗한 곳이다. 8만 4천 대장경이 거기 있기에 더욱 그렇다. 


지율스님의 단식 투쟁은

지율스님이 행한 단식은 정신수행과 자연과의 일치다. 자연은 곧 나다. 불교가 흥할 때 나라도 흥하고, 불교가 쇠할 때 나라도 쇠했다. 지율스님이 총대를 맨 것이다. 정신이다. 극단적 방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민원은 없나?

산사에 있는 사찰이 아니라 동네에 위치해 목탁소리, 종소리 때문에 많은 민원이 제기되었다. 민원인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요청하며, 우리도 자제했다. 청룡사가 먼저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지금은 다 하고 있다. 오히려 주위 분들이 종소리에 지주 삼는다. 늘 국가와 시 그리고 시민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것을 알아준다. 대종을 치는 것은 우주 소리를 알리는 것이다. 지옥중생과 축생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는 의미를 담아 새벽에 28번, 저녁에 33번 친다.


종교 간에 상호 인정해야

모든 종교의 참 삶은 하나다. 즉 선을 택하고 있다. 일체의 마음을 착함으로 일관한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도 많은 자아반성을 하며 자신을 찾는데 주력한다. 중생들이 처음엔 부처 믿고 오지만 중생은 부처를 만들 수 있는 본래 본성 있다. 부처님을 통해 불성이 개발된다. 생사는 취해서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처럼 창조주가 있어서가 아니다. 창조주는 바로 자기다. 죽음이 없으니 부활도 없다. 종교를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깨닫는 게 우선이다. 중생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사상을 벗어나면 도인이 된다. 종교를 바로 갖게 되면 경계가 없다.
‘계명성’교회 건축 입당 예배 때 가서 축사했다. 신자들이 좋아했다. 후에 고완철 목사님이 화분을 보냈는데, 보낸 정신을 높이 산다. 마음에 부정성이 없다. 전부 긍정적이어서 탑에다 올려놓았다. 아무 것이나 탑에 올리지 않는다. 그만큼 의미를 둔다는 말이다.


수련은 어떻게 하나

개인 수련은 예전엔 시간 정해 놓고 하다가 지금은 마음 닿는 대로 참선한다. 밝은 세상인 낮에는 안정과 포근과 웃음이 있다. 그래서 티클 만큼도 눕지 않는다. 밤 9시부터 자게 되는데, 여긴 산사가 아니라 늦게 자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벽에 잠들고 새벽예불에 나가기도 한다. 교도소에서 나온 이들 전화 상담이 주로 많고, 개인적으로 잠은 죽는 것이라 여겨 아낀다. 지금은 불교의 7월 백중 기간이다. 조상님들의 은혜 갚는 날이라 밤에 잠 안자고 용맹정진 수행을 일주일간 행한다.  
사찰에는 일년 중 정해진 불교 명절과 법회 날이 고정되어 있다. 불교의 명절은 불탄일, 출가절, 성도절, 열반재일, 우란분절이 있는데 5대 명절이다.  우란분재일은 백중재일, 음 7월 15일이다. 스님은 인터뷰 이틀 후에 백중재일을 마치고 머리를 깎는다고 한다. 이 날은 불교의 어버이 날이자, 스님들이 하안거를 해제하는 날이다. 


광명의 불교 교세는?

광명에는 포교원 포함해 200개 정도의 사찰이 있다. 크고 작게 부처를 모신 것이 많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불교는 아니다. 그 중에는 미신을 믿는 분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분들도 부처님의 경전 한 구절은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는 법운스님 모습


보시에 항상 힘써.   3년 전 다리 다쳐 거동 불편

법운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자연세계에 심취했다. 예를 들어 병들어 죽어가는 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를 만난 이상 개로 환생해선 안 돼’ 했는데, 개가 스님 쳐다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스님은 이처럼 작은 미물부터 사람까지 큰 지혜를 말씀하시고 행하신다고 청룡사 사무장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스님은 이러한 자비심으로 모든 자들에게 인연이 닿으면 돕는다. 육바라밀(六彼羅密)에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실천덕목 중 보시(普施)가 있다. 자비심을 지니고 널리 베푸는 것이 보시다.
언제가 서울 구치소에서 살다 나온 이는 5년 동안 구걸하러 왔는데, 가르쳐 스님이 되게 했다. 주로 수감 끝나고 나온 이들에게 리어카도 사주고, 아기도 키워주고, 학교 보내주고 방 얻어 주는 일을 했다. 현재 빚지고 있는데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철산여중과 광문중학교에 장학금을 보냈고, 지금도 영등포교도소와 구치소에 매월 3째 수요일이면 간다. 작년 2월부터 매 주 철산종합사회복지관에 있는 노인요양원을 위안 방문 한다. 일주일이 자주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법운 스님은 광명시 시정 자문위원을 역임하고, 평통자문위원과 푸른 광명 21에 참여하고 있다. 3년 전 평통자문위원으로 금강산 상팔담을 내려오다가 발을 다쳐 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참선을 장마에 억수비를 맞으며 4시간 씩도 하고, 영하 17도에서 8시간 이상 하는 등 오랫동안 해 온 참선으로 연골이 닳아 더욱 거동이 불편하다. 그래서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스님은 여러 활동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2003년 5월 24일 대통령으로부터 종교대상을 수상하고, 올해 2004년엔 복지부 장관 상을 수상했다.
 

독자들에게 한마디 "모든 것은 연기다"

출가 전에는 인연을 구분했으나 지금은 인연의 경계가 없으니 더욱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어두운 곳을 눈귀로 접한다. 그리고 남보다 빨리 뛴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랴’ 는 생각으로 노파심 갖고 열심히 한다. 세계는 연기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노병사가 있다. 길가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 우주 전체가 연관돼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존중, 예우하고,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알게 된다. 좋고 나쁜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내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 크고 작은 일에 내 능력만큼 해야 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는 말처럼 서로 화합,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기자 주> 불교에선 스님을 대하는 예절을 몇 가지 규정하고 있는데, “스님에게 나이나 과거(세속의 인연) 등을 물으면 안 된다”도 해당된다. 기자는 그것도 모르고 제 일문으로 여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답해 주시며, 그 점을 가르쳐 주시는 등 성심껏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신 스님께 감사드린다. 인터뷰는 8월 28일 오전에 청룡사에서 진행되었다.

2004. 8. 30  이재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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