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동 이봉례(75세) 할머니
하안동 이봉례(75세) 할머니
  • 이재길기자
  • 승인 2005.01.10 15: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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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봉례 할머니와 중증장애인인 딸

산업화 과정의 전형적인 도시빈민

이봉례 할머니는 1992년에 하안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소작농을 하던 남편과 함께 도시로 상경한 지 17년 만이다. 부천 역곡에서 손수레로 채소 장사하면서 시작한 도시생활이 남긴 것은 가난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당시 180만원의 임대보증금이 재산의 전부였다. 전형적인 도시빈민으로 살고 있던 차에 누군가 알려준 영구아파트 임대 소식은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그 후 10년 뒤인 지난 2003년에 남편과 사별했다. “근 5년을 중풍에 시달리던 바깥양반이 6년차를 맞고 싶지 않았던지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은 독신이라 친척도 거의 없다고 한다. 이제 임대아파트에 남아서 살아가는 이는 모녀 뿐이다. 
이 봉례 할머니는 서른일곱 살 먹은 딸과 함께 월 3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 봉례 할머니는 국민기초생활보호대상자다. 그래서 시에서 매달 최저생계비로 주는 30-40만 원과 중증장애인인 딸에게 6만원의 지원금 나온다. 이 돈에서 관리비는 최대한 절약하여 13-14만원여를 내고 나머지 금액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1급 장애인 딸이 가장 큰 근심

이봉례 할머니 가족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직업을 찾지 못한 이유가 크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치료를 위해 빚을 졌기 때문이다. 서른일곱 살 먹은 딸은 정신지체장애 1급이고, 1종 의료급여대상자다. 딸이 이렇게 된 것은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다가 전철에 치인 까닭이다. 당시 전철기관사가 용산철도병원에 데려다 놨는데, 전치 8주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보상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벌금 안 낸 게 다행이라 여기며, 병 수발했다. 당시 통행금지 시절이었는데, 역곡에서 용산까지 매일 병 수발 하러 다녀야 했다. 그 고생보다 한스러운 것이 치료비 때문에 사후 치료를 해주지 못한 점이다. 그 때문에 영구장애자가 되고 만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고 한다. 
빚을 내서 치료에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철에 치이면서 오른쪽 뺨의 광대뼈가 없어지고, 반신마비가 되었다. 무엇보다 뇌를 다쳐 간질이 발생한 것이 문제였다. 항상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먹고 살려니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볼 일 있으면 문 잠그고 나가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고 후 성격도 이상해져서 다른 사람이 보호하기 힘들다. 거의 아기상태이다. 온 종일 타월과 비누, 그리고 찬송가 책을 들고 살면서, “목욕 가자”, “교회 가자”하고 보채고 졸라댄다. 앉아있거나 누워서 생활해야 하는 까닭에 몸무게 유지를 위한 음식조절도 신경 써서 해야 한다. 착하지만 성질이 있어 성격 건들면 더욱 힘들게 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딸의 눈치 보면서 산다. 
가장 큰 문제는 혼자 일어나서 어디를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넘어져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곤 한다. 얼마 전에도 화장실 가다가 넘어져서 이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할머니 혼자 딸을 데리고 병원 오고가는 일도 버겁다고 한다. 신경외과를 다니면서 약을 먹은 후 부터는 간질 발작이 월 2-3회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한 번 간질이 발생하면, 15-20분간은 거의 죽은 사람 된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무엇보다 딸에게 치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소원이다. 
“이천만원이 넘는 비용이라 엄두를 못 내겠어요. 그저 이라도 성해야 먹고 살 텐데, 저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그나마 할머니 자신도 관절염과 골다공증에 시달리면서 몸이 자주 아픈 상태이다.


41살 된 외아들 가슴에 묻어

이봉례 할머니는 10년 전에 41살 된 외아들을 잃었다. 외지에 가서 사고로 추락사한 것이다. 마른하늘에 청천벽력보다 더 큰 충격과 슬픔에 혼이 달아났다. 딸이 당한 사고 때문에 평생 고생해 오던 터에 애지중지, 오매불망 키워낸 자식이 어느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식, 그것도 외아들을 사고로 잃어버린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픈 것일까? 
소설가인 박완서는 외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한 말씀만 하소서』란 책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교만에 대한 벌로 여기다가 신은 필요 없다며, 자신의 살의를 위해서만 신이 필요하다고 절규한다. 그러다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에서 찾은 도덕의 상태를 넘어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느끼고, “나를 넘어서서 타인을 발견하고, 타인을 넘어서서 절대자를 깨닫게 되는 바로 거기에” 고통이 주는 의미가  있다고 고백한다. 할머니도 그런 것이리라.


아픔을 넘어 타인에 대한 봉사로

이봉례 할머니는 ‘푸드뱅크’라는 곳에서 봉사한다. 매일 오후 4-6시까지이다. 푸드뱅크는 한국지역복지봉사회에서 주관하는데, 음ㆍ식료품 제조업, 도ㆍ소매업자 등으로부터 식품을 기탁 받아 어려운 이웃에게 연결ㆍ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 단체다. 하안3동 주공1304동 지하상가에서 하는데, 할머니는 중간에 9단지 지역복지관에서 나눠 주는 일을 거들고, 5가정에 배달도 직접 한다. 
함께 봉사하고 있는 하숙례 씨는 “할머니는 자신의 처지도 어려운데, 매일 나오셔서 남들보다 열심히 하세요. 며칠 전에는 봉사하시다가 그만 쓰러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얼굴 적당히 내밀고 상 타는 분들도 있는데, 할머니 같은 분들이 진짜 봉사자이십니다”라며 안타까워 한다. 
 기자가 자신도 살기 힘드신데 더군다나 아픈 몸으로 힘들게 봉사하시냐고 물으니, “저보다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도와야 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되지 않겠어요. 저는 이만큼 살게 해주신 것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하면서 연신 부끄럽다고 하신다.
  
 올해는 할머니 가족을 비롯하여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일어서고, 잃어버렸던 행복의 날개를 다시 되찾기를 기원 드린다. 

2004. 1. 10  . 이재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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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한잎 2005-01-11 22: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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