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는 광명 역사③...종로 시위가 광명으로 오기까지
톺아보는 광명 역사③...종로 시위가 광명으로 오기까지
  • 권용화
  • 승인 2022.09.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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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요약. 이정석은 1919년 3월 노온사 경찰관 주재소 근방에서 "대한독립만세" 만세 운동을 벌인 죄로 연행되었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마을 주민을 모아 곤봉과 돌을 들고 경찰주재소를 찾았다. 이정석을 찾는 마을 주민들에게 순사는 "칸리나레 이야쿠네토" 라며 내일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아버지 이종원은 고종 즉위 원년에 태어나 동학농민운동, 시흥군 농민봉기를 경험하고,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종원은 순사에게 순순히 아들을 내놓을 수 없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1919년 3월 28일 당시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 시위에 300명이 모였다고 기록했다.

[문서] 소요사건보고임시보 제12호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1919.3.1.-1919.4.30.), 조선헌병대사령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1919. 5. 10 / 자료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태극기 목판 사진] 1919년 3.1 운동 기간 중 태극기를 찍은 것으로 보이는 목판 32×30㎝ 국가등록문화재 제385호 / 자료 출처ⓒ독립기념관

천황이 태왕 전하에게 국화 무늬 목도리를 보내다
묘시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다

순종실록부록10권, 순종 12년 1월 21일 양력

와병 중인 고종이 일왕에게서 받은 목도리는 이씨 왕조의 상징을 고려한 배꽃 무늬가 아니라, 일왕을 상징하는 국화 무늬였다.
고종은 죽는 순간까지 일본의 신하로 대우받았다.

 

승전국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하는 가운데, 식민지 약소국들의 독립에 대한 희망적 기사들이 외신에 발표되었다. 고종의 죽음은 일제 독살설이 맞물려, 반일 감정이 드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고종의 국장 날 전후는 자연스럽게 군중들이 모일 기회요, 일제의 만행과 조선의 상황을 해외에 알릴 거사의 날로 모의되고 있었다.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조선을 대변할 대표로 파리강화회의를 향해 출발시켰다. 또한 젊은 일본 도쿄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선언’을 결의한다.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 한국유학생 /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독립기념관

1919년 1월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도쿄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조선독립을 주창하고 실행위원을 선출했다. 이들은 일본 내 각국 대사관과 언론사에 선언서를 보내고, 2월 8일 재일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선언문 낭독 직후 참가자들은 체포되거나 강제 해산 당했다. 국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송계백(가운데 줄 맨 오른쪽)은 실행위원 중 한 명으로 투옥 중 옥사했다. 이후 2월 12일, 23일에는 히비야 공원에서도 선언문 낭독을 하고 만세시위 행진을 시도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귀국하여 고국의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2.8 독립선언서, 3.1운동의 도화선이 되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출신 유학생 송계백이 유학생단 대표로 조선에 들어와, 중앙고등보통학교 현상윤 선생에게 전달했다.

국경 너머 중국 길림 땅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일원들의 밀서 역시 조선에 닿고, 국내 지도자들이 총단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2·8독립선언서는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3.1운동 당일 민족대표 33인은 스스로 체포되어 구심점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날 밤 인쇄되어 3월 1일 새벽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배포된 《조선독립신문》 1호의 내용을 보면, 민족대표의 자발적 체포 행동은 계획된 것이었다.

 

(현대어 번역: 정승교)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김병조씨 외 31인이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 안에서 발표하였으며 이후 동 대표 여러분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한다. 

민족 대표 여러분들의 부탁 조선 민족 대표 여러분들이 마지막 한 마디 말을 동지들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조선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물로 바치고자 하니 우리 신성한 형제들께서는 우리들의 뜻을 관철하여 주시오. 어느 해 어느 날까지라도 우리 이천만 민족이 마지막 한 사람이 남더라도 난폭한 행동이나 파괴적 행동은 결단코 하지 마시오. 한 사람이라도 난폭한 파괴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조선을 영원히 구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니 대단히 주의하고 절대로 신중함을 지키시오. 

전 국민의 반향 3월 1일 민족 대표 여러분이 끌려가는 것과 동시에 전 국민이 민족 대표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일제히 행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1919년 전국 만세시위 횟수
ⓒ국사편찬위원회
종교인, 학생, 상인, 공인, 농민평범한 이들의 목숨을 건 만세운동

1919년 3.1 만세운동은 결국 주동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민중운동, 비폭력 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 국내뿐 아니라 한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만세의 물결이 일었다.

주동자가 체포되면 다른 이가 주동자가 되고, 그마저 체포되면 또 다른 주동자가 나섰다. 민초들은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다. 일제는 이 시위들이 외신을 타고 해외로 퍼져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했다.

 

동맹휴학, 동맹파업
1919년 3월 5일의 학생단・노동자 시위

3월 1일 경성과 이북 대표 도시들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난 후, 경성의 시위는 3월 3일 국장 때 잠시 사그라졌다가 3월 4일 경성 내 각 전문학교, 중학교생도들이 결석을 결행하며 만세를 불러 다시 불 붙었다.

지방 학생은 고향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의하며 귀향했다. 학생단은 조선 역사 교육, 일본인 교사 배제 등을 외치며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현 서울역)에서 시위한다. 학생단 예비모임터는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였다.

 

“서울에서 손병희 등이 독립을 선언하여 경성과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의 독립을 이룰 때는 바로 이때다”

학교와 종교계 등을 중심으로 태극기, 각종 격문과 선언서, 지하신문이 제작・보급되면서 시위는 최초 도시에서 계속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국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융희 황제(순종)에게 올리는 각 도 유생 이름의 상소문 역시 줄을 이었다.

마침내, 일제의 외신 감시망을 뚫고 조선 독립 운동가들의 전보가 미국 한인 독립운동의 본산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에 닿았다. 최초의 만세가 터진지 9일 만인 3월 10일이었다. 이즈음 김규식 역시 파리에 도착해 파리강화회의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국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국은 이미 3월 1일에 주요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일본의 통제로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경성 시위는 26일~27일 절정에 다다랐다.

경기도 시흥군에서는 3월 7일 시흥군 시흥공립보통학교 동맹 휴교와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 시흥공립보통학교는 서면분교장 학생들이 3학년이 되면 진학하던 학교였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1910~1918)으로 일제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영등포면 등 인근 도시 지역으로 이주한 바 있었다.

서면 노온사주재소 앞의 이정석 만세시위(3.27), 이정석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주재소 습격과 야간 만세 시위(3.28)는 지금의 소하동 안서중학교 자, 작은 동산 위에서 다 같이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 미 대통령 W. 윌슨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자국 내 100여 소수민족에 대해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하는<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1917. 11. 15)을 선포했다. 또한 1918년 1월 윌슨이 발의한 국제연맹 창설・민족자결주의 등은 조선 독립에 뜻을 품은 지하운동가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윌슨이 새로운 세계 질서로 내세운 위 문구는 사실 패전국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독립시켜 패전국의 힘을 빼고, 전후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한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사 모은 쌀을 한 번에 실어 가려는 것이니 가는 곳은 동경이라…” - 매일신보 1918. 7. 23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제는 자신들의 식량난을 조선 쌀로 해결했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쌀 가격이 치솟고 구할 수가 없어 고통이 극에 달했다. 중하층 민초들은 풀뿌리나 대나무 채취물로 연명하고 진흙을 물에 타 밤가루를 섞어 끓인 물을 마시는 등 굶주림이 죽음에 이를 지경이었다. 철도 노동자, 공장 직공, 고용 어부 등조차도 민생고를 항의하며 동맹 파업과 소요를 일으켰으나, 그마저도 징역이나 태로 다스려졌다.

한편, 1918년 전염병으로 사망한 환자수가 139,152명으로 독감감염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대정 8년) 이는 인구 120명 당 1명이 사망한 것으로 통계를 내는 것 외에 아무런 조치 없는 일제의 방관에 민심이 흉흉했다.

참조 자료 : 《매일신보》에 나타난 3. 1 운동 직전의 사회 상황, 이정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990

<br><br>​​​​​​​1920년대 제물포항에서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쌀가마니가 쌓여 있다. 1933년에는 국내 미곡 생산량의 53.4%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1920년대 제물포항에서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쌀가마니가 쌓여 있다. 1933년에는 국내 미곡 생산량의 53.4%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자료 및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samil 2022
독립기념관 https://i815.or.kr 20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4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3. 1 운동 독립선언서와 격문> 국가보훈처 2002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전국역사교사모임 2010
<외신 속 3. 1운동> 연합뉴스 2019
<3.1 운동과 기독교-3.1운동 대중투쟁 단계에서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이덕주
디지털광명문화대전-일제강점기편 양철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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